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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간단한 우리나라 역사 상식 공부 (삼국시대 고구려편) - 개이득컴퍼니 (개이득 OF LIFE)

간단한 우리나라 역사 상식 (삼국시대 고구려편)


고구려




건국 : 주몽(동명성왕)

전성기 : 광개토대왕 ~ 장수왕

패망 : 보장왕

망한 이유 : 수나라, 당나라와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국력이 기울어 가는 시점에 대막리지(절대권력자)였던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이 대막리지의 자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장남인 연남생은 동생들에 쫒겨 당나라로 망명을 갔다. 후에 연남생은 당나라의 고구려정벌을 도와 고구려를 멸망하게 만든다. 668



주요 사건


수나라의 1차 침공


중국전역을 2번째로 통일한 수나라의 문제가 고구려로 침공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고구려의 영양왕은 오히려 수나라를 1만의 병사로 선공한다. 이 사실을 안 문제는 분통하며 곧이어 대군을 고구려원정을 보낸다. 하지만 고구려에는 을지문덕과 강이식, 고건무같은 뛰어난 장수가 많았다. 육군은 요서에서 패하고 수군은 황해 북부에서 괴멸당한다. 3개월의 전투에서 수나라군사의 십중팔구는 전사했다. 고구려의 압승이였다.



수나라의 2차 침공


수나라 문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양제는 문제와 달랐다. 양제는 성격이 괴팍하였음은 물론 즉흥적인 성격이였다. 고구려 1차 침공에서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준비를 하게된다. 그 결과 113만의 수나라 대군이 고구려로 정벌을 떠나게 된다. 수나라는 천리장성의 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요동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요동성은 산에 있는 산성이 아닌 평지성이였다. 하지만 성주변에 깊은 해자가 있었고 견고한 성이였음은 물론 성주가 강이식 장군이였기 때문에 요동성을 수개월 동안 지켜냈다. 양제는 요동성을 함락하는 것을 포기하고 113만의 군대를 나눠 각 천리장성의 성들을 겹겹이 포위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30만 대군의 별동대를 꾸려 평양성으로 향하게 했다. 이때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30만 별동대의 수송로를 끊어버린다. 식량이 부족한 별동대는 평양성 진군에 탄력을 잃게 되고 고구려의 명장 고건무의 기습공격에 일시적인 퇴각을 하게 된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30만 별동대의 총사령관인 우중문에게 시를 편지로 보낸다. 이 시가 여수장우중문시이다.




편지를 읽은 우중문은 퇴각을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수나라 별동대가 퇴각하는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군대를 매복해 두었다가 기습을 해 적군의 30만 별동대를 괴멸시킨다. 이 때 돌아간 수나라 군사의 수는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 수나라는 결국 고구려를 정벌하려는 욕심에 나라가 기울고, 이연부자의 반란으로 인해 건국 30년만에 멸망한다.



 


당나라 1차 침공


중국 역사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당나라의 2대황제 당태종 이세민이 644년 6월 고구려 정벌을 감행한다. 수륙 양면으로 50만 대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 때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 있었다. 연개소문은 642년 자신을 죽이려는 세력들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킨다. 정변의 결과 영류왕(고건무)를 죽이고 보장왕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게 된다.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과는 달리 당나라는 만만치 않았다. 한번도 성을 뺏긴적이 없었던 고구려는 현도성, 개모성, 비사성을 연달아 뺏기더니 결국 요동성과 백암성마저 함락당한다. 결국 고구려는 안시성에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다. 




안시성은 남문을 제외하면 모든 성문이 산악지역을 끼고 있는 성이였다. 당나라의 대대적인 공습에도 불구하고 안시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당나라의 황제 이세민은 안시성의 성벽과 비슷한 높이의 토산지으라 명령하게 된다. 토산이 완공되자, 이 토산의 꼭대기에선 성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폭우로 인해 토산이 무너져 성을 덮치는 바람에 안시성 성벽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자 연개소문의 명령으로 안시성의 고구려 군대는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그 뒤 펼쳐진 토산 쟁탈전에서 당군 수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고구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석달간의 공방전에서 당군은 하루 2~3천의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고구려측도 안시성 군사 중 전쟁을 할 수 있는 군사가 3만이 채 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전투는 그만큼 치열했다. 야설에서는 당태종 이세민이 토산전투에서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한쪽눈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침내 결국 요동이 추워지고, 군량이 떨어지자 퇴각명령을 내리게 된다. 


당나라의 2차 침공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일단 피하고 주변국들을 정벌하기 시작한다.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의 대군이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침공, 멸망시킴으로써 고구려는 고립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죽은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어 당나라의 침공을 다시 한번 막게됩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토 전 지역의 경제 활동에 대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 백성들의 피해도 막심했습니다.


당나라의 3차침공


대막리지의 자리를 놓고 싸우던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결국 나라의 운명을 바꾸게 된다. 장남인 연남생은 당나라로 망명을 떠나게 되고, 차남인 연남산이 대막리지에 오르게 된다. 결국 당고종은 이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고구려 3차침공을 하게된다. 연남생은 고구려정벌군이 되어 당나라군을 돕는다. 고구려는 결국 차례로 천리장성이 함락되며 결국 압록강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다. 하지만 압록강 주변은 연남생의 세력권이였으므로 고구려가 근본적으로 방어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결국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왕은 이세적에게 항복하게 된다.